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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다섯 바탕 중 하나인 <흥보가(興甫歌)>는 가난하지만 심성이 착한 흥보와 욕심 많고 심술궂은 놀보 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 후기 서민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윤리적 가치관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 중 ‘제비노정기(燕程路程記)’는 흥보에게 은혜를 입은 제비가 보은으로 박씨를 물고 강남에서부터 흥보의 집까지 날아오는 여정을 생생하고 다채롭게 묘사한 대목으로, <흥보가>의 수많은 눈대목 중에서도 특히 빼어난 예술성을 자랑합니다. 본고에서는 국립민속문학사전의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제비노정기>의 정의, 개관, 내용, 특징 및 의의를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전문가 수준의 이해를 도모하고자 합니다.

1. 제비노정기의 정의 및 개관

제비노정기는 <흥보가>에서 다리가 부러진 제비를 흥보가 정성껏 치료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제비가 이듬해 봄 박씨를 물고 중국 남방에서 조선 땅 흥보의 집까지 장장 수천 리를 날아오는 과정을 극적으로 묘사한 판소리 눈대목(작품의 특정 부분을 выделить하여 감상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단순한 이동 경로의 나열을 넘어, 제비의 눈에 비친 각 지역의 풍경과 정서, 그리고 머나먼 여정의 고단함과 설렘을 섬세하게 그려내어 청중에게 마치 제비와 함께 여행하는 듯한 생생한 체험을 선사합니다.

2. 제비노정기의 역사적 형성 과정

흥미롭게도 현재와 같은 형태의 <제비노정기>는 조선 후기 고종 시대의 명창 김창환(金昌煥)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재효(申在孝)가 집대성한 『박타령』에는 <제비노정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신재효 활동 당시에는 아직 이 대목이 독립적인 형태를 갖추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초기 동편제 <흥보가>에서도 <제비노정기>의 존재는 미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송만갑에게 <흥보가>를 배운 김정문의 창본이나, 송우룡에게 배운 이선유의 창본에서도 뚜렷한 <제비노정기>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다만, 이선유의 창본에서 “백운 무릅쓰고 흑운을 박차고”와 같은 유사한 어구가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정도입니다.

그러다 장판개(張判介)의 <흥보가>에 이르러 현재 불리는 <제비노정기>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다소 유사한 내용으로 구성된 제비의 여정이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김창환이 자신의 특기(더늠)로 발전시킨 <제비노정기>는 오늘날 모든 창자들이 유파를 초월하여 즐겨 부르는 대표적인 눈대목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 김창환이 창작한 <제비노정기>와는 사뭇 다른 내용의 <제비노정기>가 김창환의 소리라고 소개되어 있다는 점인데, 이는 정노식이 김창환의 실제 소리를 직접 듣지 못하고 기록했거나, 혹은 김창환에게 또 다른 버전의 <제비노정기>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3. 김창환제 제비노정기의 내용 분석

오늘날 널리 불리는 김창환제 <제비노정기>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 첫째 부분: 중국노정기(中國路程記)

    제비가 강남을 출발하여 중국의 유명한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는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단가 <소상팔경(瀟湘八景)>이나 <심청가(沈淸歌)>의 <범피중류(泛彼中流)> 등 다른 판소리 작품의 아름다운 구절들을 차용하여 짜여진 것이 특징입니다. “흑운 박차고 백운 무릅쓰고 거중에 둥실 높이 떠 두루 사면을 살펴보니 서촉 지척이요 동해창망하구나.”로 시작되는 <제비노정기>는 제비가 가볍게 창공으로 날아올라 유유히 비행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특히 박녹주는 ‘떠’라는 음을 30박에 걸쳐 높고 길게 처리함으로써 제비가 아득한 창공에 떠서 나는 모습을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듯이 섬세하게 표현해냅니다.

    박씨를 입에 물고 조선으로 향하는 제비는 중국 서남부의 서촉 지방에서 출발하여 광활한 대륙을 가로지르며 축융봉, 회양봉, 황릉묘, 봉황대, 황학루, 금릉, 종남산, 이수, 계명산, 남병산, 만리장성, 갈석산, 연경(베이징), 황극전, 경양문, 상달문, 봉관 등 수많은 명승지와 유적지를 방문합니다. 각 지명을 언급할 때마다 관련된 한시나 고사를 곁들이고,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조감 시점으로 읊조리기 때문에 청중은 마치 제비와 함께 중국 대륙을 탐험하는 듯한 흥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 둘째 부분: 북방노정기(北方路程記)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내려오는 험준한 북방의 여정을 그린 부분으로, 무가(巫歌)인 <호귀노정기>의 여정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이는 천연두를 옮기는 외래신인 호구가 사람들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내려오는 과정을 묘사한 무가 <호구거리>의 내용과 흡사한 구조를 지니는 것입니다.

    <제비노정기>의 북방 노정은 다음과 같이 전개됩니다. “요동 칠백리를 순식간에 다 지내여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다다라 영고탑 통군정을 올라보고 안남산 밖남산 석벽강 용천강 좌호령을 넘어 부산파발 할마고개 강동다리를 건너 칠성문 들어가니 평양의 연광정 부벽루를 구경허고 대동강 장림을 지내여 송도를 들어가 만월대 광덕전 박연폭포를 구경하고 임진강을 건너 삼각산에 올라 앉아 지세를 가만히 살펴보니 청룡의 대원맥이 충령으로 흘러져 금화 금성이 분계하고 춘당영춘 휘돌아 도봉 망월대 솟아 있다. 문물이 빈빈하고 풍속이 희희만만세지금탕이라.” 이 부분은 서북 지방의 아름다운 경치를 경쾌한 장단을 통해 빠르게 훑어 내려가는 재미가 특별하며, 마침내 서울의 웅장한 지세를 바라보는 감격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임진강’이라는 대목에서 ‘이~임’ 하고 길게 늘여서 부르는 것이 또 다른 감상 포인트입니다.

  • 셋째 부분: 남방노정기(南方路程記)

    한양에서 흥보의 집이 있는 남쪽 지방으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 부분으로, <춘향가(春香歌)>의 <어사노정기(御史路程記)> 앞부분의 내용을 일부 차용하고 있습니다. “경상도는 함양이요 전라도는 운봉이라 함양 운봉 두 얼품에 흥보가 게서 사는지라 저 제비 거동봐라 박씨를 입에 가로 물고 남대문 밖 썩 나서서 칠패 팔패 청파 배다리 애고개 지내 동작강 월강 승방을 지내어 남태령 고개 넘어 두 쪽지 옆에 끼고 수루 수루 수루 번듯 솟아 거중에 둥둥 높이 떠 (······) 흥보집을 당도하여 안으로 펄펄 날아들어 들보 위에 올라 앉어 제비 말로 운다 지지지지 주지주지 거지연지 우지배요 낙지각지 철지연지 은지덕지 수지차로 함지표지 내지배오 삐드드드드.” <춘향가>에서 암행어사 이몽룡이 남원으로 향하는 여정과 신임 사또가 남원으로 부임하는 여정을 묘사하는 데 두 번이나 사용되는 남방 노정기의 앞부분을 간결하게 가져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후 흥보의 집에 도착한 제비가 자신의 언어로 기쁘게 우는 소리를 흉내 내는 대목은 듣는 이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 넷째 부분: 흥보의 환대

    늦은 중중모리 장단으로도 불리는 이 부분은 흥보가 다시 돌아온 제비를 보고 반가움을 표현하는 장면입니다. 제비의 아름다운 모습을 칭찬하는 내용으로, 이는 <춘향가>에서 이몽룡이 춘향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녀를 칭찬하는 사설 대목을 차용한 것입니다. “흥보가 보고서 좋아라고 너 왔느냐 너 왔느냐 반갑다 내 제비야 어디를 갔다가 이제 와 당상당하 비거비래 편편이 노는 거동은 무엇을 같다고 이르랴 북해흑룡이 여의주를 물고 채운간으로 넘노는 듯 단산봉황이 죽실을 물고 오동 속으로 넘노는 듯 귀곡청학이 난초를 물고 송백간으로 넘노는 듯 안으로 펄펄 날아들제 저 제비 거동을 보아 보은표 박씨를 입에다 물고 이리저리 거닐다 흥보 양주 앉은 앞에 뚝 떼그르르르 떨리쳐 버리고 백운간으로 날아간다.” 이 대목은 흥보의 순박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보여주는 동시에, 제비의 보은에 대한 감사를 간접적으로 드러냅니다.

4. 제비노정기의 특징 및 의의

<제비노정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과 의의를 지닙니다.

  • 생생하고 역동적인 묘사: 빠르고 경쾌한 중중모리 장단 또는 늦은 자진모리 장단에 맞춰 제비가 힘차게 날아가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특히 중중모리 장단의 다채로운 리듬 구조는 제비의 날갯짓과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말의 악센트와 리듬의 악센트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듣는 재미를 더합니다.
  • 웅장한 스케일과 다채로운 볼거리: 중국 대륙과 한반도의 주요 지명을 씩씩하고 굳건한 우조 성음으로 읊조리는 대목은 마치 제비의 눈을 통해 광활한 천하를 유람하는 듯한 웅장함과 다채로운 볼거리를 선사합니다.
  • 서편제와 동편제의 교합: 서편제의 대가인 김창환이 창작한 <제비노정기>는 완전한 계면조 음악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꺾는 음의 사용을 통해 서편제의 특징을 드러내면서도 우조 성음을 평조로 구사하는 독특한 음악적 특징을 보여줍니다. 이는 서편제 초창기 소리가 동편제나 중고제 소리와도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박녹주의 <제비노정기>가 계면조로 짜인 것과 비교해 볼 때, 김창환의 음악적 특징을 더욱 명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 문학적 상상력과 현실 경험의 조화: <제비노정기>의 중국 노정은 실제 이동 경로라기보다는 당대 문학 작품을 통해 형성된 문학적 기행의 성격이 강합니다. 하지만 연경에서 압록강을 거쳐 한양으로 이어지는 북방 노정은 조선시대 연행사(燕行使)의 귀환 경로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이는 판소리 사설에 연행사의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당시 명창들이 연행사를 따라 평양 등 서북 지방에서 환영 공연을 했던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순히 무가 사설의 영향을 받은 것뿐만 아니라, 실제 연행에 참여했던 소리꾼들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는 점에서 <제비노정기>는 더욱 풍부한 의미를 지닙니다.

<흥보가>의 <제비노정기>는 한 마리 제비의 기나긴 여정을 통해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다양한 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예술적으로 뛰어난 눈대목입니다. 김창환이라는 명창의 창의적인 노력으로 탄생한 이 대목은 판소리의 음악적, 문학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며, 당시 사람들의 상상력과 세계관을 반영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닙니다. <제비노정기>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판소리 <흥보가>를 넘어 한국 전통 문화의 다채로운 매력을 경험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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