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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다섯 바탕 중 하나인 <수궁가(水宮歌)>는 토끼와 별주부라는 친숙한 동물 캐릭터를 통해 용궁이라는 이색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기만과 지략의 대결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흥미로운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 후기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과 권력층의 위선을 날카롭게 풍자하며 깊은 공감을 얻어온 작품입니다. <구토지설(龜兎之說)>이라는 고전 설화를 근간으로 다채로운 구전 및 문헌 설화가 융합되어 탄생한 <수궁가>는 해학과 풍자를 뛰어넘어 당대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본고에서는 국립민속문학사전의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수궁가>의 정의, 기원, 내용, 등장인물, 창본, 그리고 그 특징 및 의의를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전문가 수준의 이해를 도모하고자 합니다.

 

1. <수궁가>의 정의 및 개관

<수궁가>는 병든 용왕을 치료하기 위해 육지의 토끼 간을 구하러 간 별주부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갖은 꾀를 쓰는 토끼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판소리입니다. 겉으로는 토끼와 별주부의 속고 속이는 지략 싸움을 그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허약하고 무능한 용왕과 그를 둘러싼 권력자들의 모습, 그리고 이에 맞서는 민중들의 지혜와 풍자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동물 우화를 넘어, 조선 후기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중요한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2. <수궁가>의 기원 설화: <구토지설>

<수궁가>의 가장 핵심적인 토대는 고구려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인 <구토지설(龜兎之說)>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김춘추가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다가 억울하게 옥에 갇혔을 때, 보장왕이 총애하던 선도해라는 인물이 김춘추에게 이 <구토지설> 이야기를 들려주어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이는 <구토지설>이 이미 삼국시대부터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음을 시사합니다.

 

3. 불교 설화와의 연관성

<구토지설>의 기원은 인도 본생설화(本生說話, Jātaka)나 『육도집경(六度集經)』과 같은 불교 설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석가의 전생 이야기를 담은 본생설화는 기원전 3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불교의 동점과 함께 다양한 불교 경전이 한역되어 우리나라에 전해졌습니다. 이러한 불교 설화들이 <구토지설>과 같은 문헌 설화나 구비 설화로 정착되었고, 이것이 판소리 <수궁가>의 모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4. <수궁가>의 형성 및 발전

<수궁가>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발생 및 형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초기에는 독립적인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다른 민간 연희 속에 혼재되어 있었으며, 내용 또한 단순한 토끼의 지략담 위주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19세기에 이르러 <수궁가>는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송흥록, 염계달과 같은 당대 최고의 명창들이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이나 <토끼가 별주부에게 욕하는 대목> 등 특정 대목을 특기로 삼아 공연하면서 <수궁가>는 인기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 시기는 판소리가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뉘어 음악적으로 발전하고, 지식층의 참여로 내용과 주제 면에서도 심화가 이루어진 중요한 시기입니다.

 

19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신재효(申在孝)는 <토별가(兎鼈歌)>라는 이름으로 <수궁가>를 개작했지만, 지나치게 문학적인 개작으로 인해 실제 공연에서는 거의 불리지 못하고 기존의 <수궁가>가 그대로 전승되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 이선유(李善有)는 신재효의 여섯 마당 중 <변강쇠타령>을 제외한 다섯 마당을 전승하면서 <수궁가>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수궁가>가 다양한 창자 계열의 고정된 창본으로 정착되고, 방각본이나 한문본으로 출판되어 독서물로서도 인기를 얻으면서 판소리와 판소리계 소설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한 시기입니다.

 

5. 현전하는 <수궁가>의 다양한 이본

현재까지 전해지는 <수궁가>(『토끼전』)의 이본은 창본, 판각본, 필사본, 활자본을 망라하여 약 120여 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명칭 또한 <수궁가>, 『토끼전』, 『별주부전』, 『토의간』, 『불로초』, 『토별산수록』, 『별토문답』, 『수궁용왕전』 등으로 매우 다양하며, 이본 간의 내용 차이도 다른 판소리 작품에 비해 큰 편입니다. 이는 <수궁가>가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 향유되고 변형되어 왔음을 보여줍니다.

 

현전하는 이본들은 내용적 특징에 따라 가람본 『별토가』 계열, 신재효본 계열, 『수궁가』 계열, 경판본 계열, 『중산망월전』 계열, 가람본 『토긔젼』 계열 등 여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 중 가람본 『별토가』, 신재효본 계열, 『수궁가』 계열은 창본 또는 창본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나머지 계열은 소설본에 가깝습니다.

 

6. <수궁가>의 전승 계보

현재 <수궁가>는 송흥록에서 비롯되는 동편제와 박유전으로 시작되는 강산제 두 계열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동편제는 이선유제, 송만갑제, 유성준제로 나뉘는데, 이선유제는 현재 전승이 끊어졌습니다. 송만갑제는 박봉래-박봉술을 거쳐 송순섭 명창에게, 유성준제는 정광수 바디, 임방울 바디, 김연수 바디, 박동진 바디 등으로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습니다. 강산제는 정재근-정응민-정권진을 거쳐 정회석 명창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전승 계보는 <수궁가>가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명창들의 개성과 노력을 통해 발전해왔음을 보여줍니다.

 

7. <수궁가>의 내용 분석

<수궁가>의 줄거리는 용왕의 병환으로 시작하여 토끼의 기지로 끝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 과정 속에서 다양한 에피소드와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용왕의 병과 토끼 간의 필요성: 남해 용왕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고, 도사는 토끼의 간을 먹어야 병이 낫는다고 처방합니다. 이는 허약하고 무능한 통치자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 별주부의 육지행과 토끼의 유혹: 용왕은 대신들을 모아 육지에 가서 토끼를 잡아올 사자를 찾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이때 별주부 자라가 자원하여 토끼 그림을 가지고 육지로 향합니다. 별주부는 감언이설로 토끼를 꾀어 용궁으로 데려갑니다. 이는 권력자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어리석은 신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 토끼의 기지와 용왕의 어리석음: 용왕 앞에서 간을 내놓으라는 말에 토끼는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어리석은 용왕은 토끼를 믿고 다시 육지로 보내 간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이는 지혜로운 백성이 어리석은 권력자를 농락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 토끼의 탈출과 별주부의 귀환: 육지에 도착한 토끼는 별주부를 조롱하며 숲 속으로 도망치고, 별주부는 토끼 똥을 간으로 속여 용왕에게 바칩니다. 이는 민중들의 기지와 해학을 보여주는 동시에, 권력층의 무능함을 다시 한번 드러냅니다.
  • 토끼의 시련과 극복: 육지로 돌아온 토끼는 그물에 걸리거나 독수리에게 잡힐 뻔하는 등 여러 위기를 겪지만, 매번 지혜롭게 극복하며 살아남습니다. 이는 민중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송흥록과 관련된 일화는 <수궁가>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연인이었던 맹렬을 되찾기 위해 진주 병사 앞에서 공연하게 된 송흥록은, 맹렬의 계략으로 인해 관객을 웃기고 울려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합니다. 그는 <수궁가>를 통해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판소리의 뛰어난 예술성과 힘을 입증했습니다. 이는 <수궁가>가 때로는 어렵고 진중하지만, 능숙한 창자에 의해 희극과 비극을 넘나드는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작품임을 보여줍니다.

 

8. <수궁가>의 구조적 특징

<수궁가>는 반복 구조와 대립 구조라는 뚜렷한 특징을 지닙니다.

  • 반복 구조: 수궁과 육지를 반복적으로 오가는 공간의 변화와, 위기와 극복이 반복되는 사건 전개는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흥미를 유발합니다.
  • 대립 구조: 용왕과 별주부가 대표하는 강자와 지배자의 세계인 수궁과, 토끼와 여우가 대표하는 약자와 피지배자의 세계인 육지의 대립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갈등 구조입니다. 또한 어족회의와 모족회의는 각각 관료 사회와 향촌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며 계급적 대립과 갈등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대립 구조는 풍자와 해학이라는 <수궁가>의 미의식을 구현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9. <수궁가>의 사회 비판과 풍자

<수궁가>는 다른 판소리 작품에 비해 비장미는 덜하지만, 그 자리를 날카로운 풍자와 골계가 채우고 있습니다. 병든 용왕과 무능한 어족회의 신하들을 통해 봉건 질서를 비판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용왕의 추한 모습과 부패한 권력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어리석은 별주부를 통해 정치 권력의 본질을 폭로합니다. 또한, 용왕의 병을 치료하는 장면이나 용왕이 위엄을 부리는 모습, 별주부가 아내와 이별하는 장면 등 곳곳에 해학적인 요소를 배치하여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통렬한 사회 비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0. <수궁가>의 다층적인 의미

<수궁가>는 단순한 권선징악적 교훈극이 아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작품입니다. 조선 후기 서민 의식의 성장과 함께 용왕과 별주부가 상징하는 봉건 제도와 유교 이념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근대 지향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토끼는 봉건적 억압에 맞서 개인의 자유와 인간성 해방을 꿈꾸는 민중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반면, 별주부는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인 '충'을 옹호하며 봉건 체제를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이념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은 <수궁가>가 당대 사회의 복잡한 현실과 이념적 갈등을 반영하는 작품임을 보여줍니다.

 

11. <수궁가>의 창본 비교

현존하는 다양한 <수궁가> 창본들은 각기 다른 특징을 보여줍니다. 이선유 창본은 비교적 고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송만갑제에 속하는 박봉술 창본은 그보다 후대에, 유성준제 <수궁가>보다는 앞선 시기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성준제 창본 중 가장 전형적인 형태는 정광수 창본으로, 신재효 개작본의 영향을 받아 호랑이가 미화되는 등 지배층에 대한 비판 의식이 희석되고 오락성이 강화된 특징을 보입니다. 임방울 창본은 토끼가 육지에 도착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며, 박동진 창본은 아니리가 상세하게 덧붙여져 있습니다. 김연수 창본은 다른 창본에 비해 내용이 크게 확장되었는데, 이는 정광수 창본과 신재효 개작 사설을 상당 부분 수용한 결과입니다. 강산제에 속하는 정권진 창본은 말미에 용왕이 산신에게 부탁하여 토끼를 다시 잡아와 병을 치료한다는 내용이 추가된 것이 특징입니다.

 

12. <수궁가>의 특징 및 의의

<수궁가>는 다음과 같은 특징과 의의를 지닙니다.

  • 당대 사회 현실 반영: 용왕의 병과 어족회의의 모습 등을 통해 조선 후기 사회의 정치 현실과 백성들의 인식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 지배층에 대한 비판 의식: 용왕을 비롯한 수궁의 권력자들을 어리석고 무능하게 묘사하며 지배와 종속 관계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냅니다.
  • 서민 의식의 성장: 토끼의 기지와 용왕에 대한 조롱은 봉건 체제에 저항하고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서민들의 성장한 의식을 보여줍니다.
  • 우화의 형식: 우화라는 형식을 통해 정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을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 풍부한 구전 및 문헌 설화: <구토지설>을 바탕으로 다양한 설화를 삽입하여 서사적 풍성함을 더하고, 당대 우화 문학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 다양한 전승 형태: 현재까지 판소리, 소설, 전래동화 등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으며, 마당극이나 창무극으로도 활발하게 공연되는 살아있는 고전입니다.

 

판소리 <수궁가>는 단순한 동물 이야기가 아닌, 조선 후기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비판하는 뛰어난 풍자 문학 작품입니다. 토끼와 별주부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담긴 해학과 풍자, 그리고 다층적인 의미는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깊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앞으로도 <수궁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를 통해 그 예술적, 문화적 가치가 더욱 널리 알려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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