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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당유고집(二憂堂遺稿集)>은 조선 후기 명창 권삼득(權三得)의 아버지인 권내언(權來彦)의 문집으로, 단순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19세기 판소리사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 문집은 당대 양반 지식인의 고뇌와 함께,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광대 집안의 애환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특히 명창의 아버지라는 독특한 위치에서 아들의 삶을 바라보는 권내언의 시선은, 당시 판소리 예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예술적 가치 사이의 간극을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본고에서는 <이우당유고집>에 담긴 내용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19세기 판소리 명가의 삶과 그 시대적 배경을 전문가적 관점에서 고찰하고자 합니다.

1. <이우당유고집>의 정의 및 개관

<이우당유고집(二憂堂遺稿集)>은 명창 권삼득(權三得)의 부친인 권내언(權來彦)의 개인 문집으로, 그의 사후 자손들에 의해 편집된 필사본 1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로 21.5cm, 세로 33.5cm 크기의 112쪽 분량인 이 문집은, 안동 권씨 추밀공파 28세손인 권내언의 삶과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권내언의 자(字)는 형언(衡彦) 또는 내언(來彦)이며, 호(號)는 공여(拱汝) 또는 사이(士貽)인데, 이우당(二憂堂)은 그의 대표적인 호입니다. <안동권씨대동세보(安東權氏大同世譜)>에 따르면 권내언은 1739년(영조 15)에 태어나 1816년(순조 16) 8월 14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1828년(순조 28) 전주의 사인(士人) 권내언에게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권내언이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안동권씨대동세보>에는 그가 이학(理學)과 효행이 뛰어나 1824년(순조 24)에 정려(旌閭)와 복호(復戶)가 내려지고, 사후 예조 참판으로 추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묘소는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 이목정 부친 묘 아래 오좌(午坐, 북향)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명창 권삼득은 권내언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정(檉)이며 자는 사인(士仁)이고, 1771년(영조 47)에 출생하여 1841년(헌종 7) 5월 7일에 별세했습니다. <이우당유고집>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문집은 권내언 사후 그의 삶과 생각을 기리기 위해 자손들이 모아 엮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2. <이우당유고집>의 내용 분석

<이우당유고집>에 수록된 글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권내언이 1796년(정조 20) 봄에 초가집 한 채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이름 붙인 당호기(堂號記)인 「이우당기(二憂堂記)」입니다. 이 글은 손님이 이우당이라는 호의 내력을 묻고, 권내언이 이에 답하는 문답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권내언은 자신의 호를 이우당이라고 지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님을 여의어 남의 산에 허술하게 장례를 지냈으니 불효에 걱정이 있고, 내가 노년에 자식을 잘못 길러 타향에서 여러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으니, 걱정거리가 자식 사랑을 잘못한 데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걱정거리라면 단지 이 두 가지 걱정인즉, 이렇게 집 이름을 붙인 것은 참으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이우당기」 바로 뒤에는 권내언의 벗인 진주 사람 강필성(姜必成)이 1803년(순조 3)에 쓴 「근제이우당서후(謹題二憂堂序後)」가 실려 있습니다. 이 글 역시 강필성이 권내언으로부터 이우당이라는 호를 짓게 된 연유를 직접 듣고, 그에 대한 위로와 답을 함께 적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권내언은 아버지의 묘를 제대로 이장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 후, 자신의 둘째 아들인 권삼득에 대한 깊은 근심을 털어놓습니다. “내 둘째 아들 삼득이가 내 가르침을 저버리고 술과 음악에 빠진 지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방탕한 사람들을 쫓아 놀며, 집을 떠나 밖에 있으면서 밤낮을 잊고, 욕됨을 끼치기가 끝이 없으니, 이를 금하고 막을 수가 없고, 또 끝내 얼굴조차 볼 수 없으니 이것이 두 번째 걱정입니다. 나는 이것 때문에 그 아픔이 간과 명치에까지 사무쳐서 마음이 울적하고 밖으로도 나타나니, ‘두 가지 걱정거리’라는 말로 호를 삼은 것입니다.”

이러한 권내언의 고백에 대해 강필성은 그의 마음을 위로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지금까지 삼득이가 노래를 부르고, 술에 취해 난행을 했지만, 이제 도리어 벙어리처럼 노래도 안 부르고, 맑은 정신으로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아버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양반 출신인 권내언이 판소리를 직업으로 삼아 떠돌아다니는 아들 권삼득을 얼마나 부끄럽게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판소리는 천민 계층의 예술로 여겨졌으며, 양반 가문에서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그러나 강필성은 글의 말미에서 권삼득이 이제 소리를 그만두고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다고 언급합니다. 이 글이 쓰여진 시기가 1803년이므로, 이때 권삼득의 나이는 33세였습니다. 하지만 1810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유만공(柳晩恭)의 <관우희(觀優戱)>에는 모흥갑(牟興甲)과 권삼득이 젊은 소리꾼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강필성이 권삼득이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언급한 것은, 권내언을 위로하기 위한 의례적인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권삼득이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예술적 열정을 굽히지 않고 판소리 명창의 길을 걸어갔음을 시사합니다.

3. <이우당유고집>의 특징 및 의의

<이우당유고집>에 실려 있는 권내언의 「이우당기」와 강필성의 「근제이우당서후」는 19세기 판소리 명창의 가족이 판소리 명창에 대해 직접 기록한 유일한 문헌이라는 점에서 판소리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비록 아버지 권내언은 아들의 직업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그의 기록을 통해 당대 명창의 존재와 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양반 가문에서 판소리 명창이 나왔다는 사실과, 그 아버지의 심경을 기록한 문헌은 당시 판소리가 지닌 예술적 위상과 사회적 편견을 동시에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우당유고집>은 단순한 개인 문집을 넘어, 19세기 판소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명창 권삼득의 삶과 예술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1차 자료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문집을 통해 우리는 당대 판소리 예인들이 감내해야 했던 사회적 어려움과, 그 속에서도 꽃피웠던 예술혼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우당유고집>은 명창 권삼득의 아버지 권내언의 문집으로, 19세기 판소리 명가의 삶과 그 시대의 사회적 풍경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아들의 예술적 재능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 오히려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통해, 우리는 당시 판소리 예인들이 겪었던 사회적 편견과 고난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권삼득은 자신의 예술적 열정을 불태워 명창의 반열에 올랐으며, 그의 이야기는 <이우당유고집>을 통해 후대에 전해져 판소리 연구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이우당유고집>은 단순한 문집을 넘어, 한 시대 예술가의 삶과 고뇌, 그리고 그 예술이 갖는 진정한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소중한 기록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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